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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

우리나라 여가의 역사

by 빵9남 2023.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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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세월 농경문화에 바탕을 둔 우리나라의 경우도 다양한 민속축제, 세시풍속  등이 연중 24 절기마다 성행하였다.  보수적 유교문화와 엄격한 신분제도가 자리 잡던 조선시대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여가활동은 없었고, 신분의 차이에 따라 여가활동이 달랐다.

 

1. 고대사회의 여가

 

 고대사회의 사람들은 자연에도 영혼, 즉 정령이 있으며, 동물이나 다른 사물이 자신들을 수호해주는 신(토테미즘-totemism)으로 믿고 숭배했다. 또한 선과 악의 신을 믿는 무속신앙(샤머니즘-shamanism)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점차 농경사회로 안정되어 가고 이를 중심으로 부족국가가 생겨나면서 지배계층의 권력을 강화하며, 사람들의 종교적인 의식에 대하 욕구를 충족시키고, 고된 농경생활에 대한 격려를 위해 추수감사제격인 집단여가행사가 10월에서 12월 사이에 행해졌다.  고대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여가는 정치와 종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계층중심으로 분류되었던 여가문화는 오랫동안 여가의 종류와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풍속도 (씨름)

2. 삼국시대의 여가

 

 고구려의 동맹이나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등이 대표적인 제례행사인데, 이러한 행사에는 늘 술과 음식, 춤과 같은 집단놀이 형태의 행사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에는 고대시대를 계승하고 있기는 하지만 신라, 고구려, 백제가 각기 그들의 지역특색과 정치적 상황에 맞게 이를 변형시키고 다른 모습으로 발전시켰다. 이때부터 신분계급을 강조했기 때문에 여가도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여가로 이원화되기 시작하였다. 상류계층은 학문과 풍류 등 고상하고 사교적인 여가를 즐겼고, 하층민의 여가를 천시했다. 당시 성행했던 여가로는 활쏘기, 말타기, 그네 타기, 연날리기, 씨름 등이 있었다. 

풍속도 (활쏘기)

 

 신라,고구려,백제의 여가를 차례로 살펴보면, 신라에는 명절마다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고 춤과 여러 가지 놀이를 즐겼다. 신라의 귀족자제들은 여가활동으로 '화랑도'를 중심으로 자연을 벗 삼아 유람하면서 시가를 즐기며 여러 무술활동을 했다. 또한 지배계층은 자연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심리적인 경지인 풍류를 즐겼는데, 이는 훗날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져 지배계층의 여가활동의 중심으로 전승된다.  서양의 경우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도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주로 지배계층이었다. 피지배계층은 고된 노동과 의무를 잊기 위해 무도나 음악 등을 즐겼다. 

 고구려는 지리적 요인 때문에 북방 대륙(중국)의 기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활쏘기나 말타기 등의 신체활동이 왕성한 여가를 즐겼다. 그 외에도 수렵대회나 삭전(줄다리기),답교(다리 밟기), 축구와 격구(공놀이의 일종), 위기(바둑), 연날리기 등도 즐겼다. 또한 제례행사나 레크리에이션을 위한 도구로 거문고 등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였다. 

 백제는 그들의 문화예술 유적에서 뚜렷히 드러나듯 다른 두 나라와 달리 비교적 온건하며 우아한 성격의 여가를 즐겼다. 일상생활에서 장기나 바둑 등을 즐겼으며, 축제 때에는 널뛰기, 씨름 윷놀이, 그네, 강강술래 등을 행하였다. 

 

3. 고려시대의 여가 

 

건국 이래 대륙문화의 활발한 유입과 문물제도의 정비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누렸던 고려시대에는 국교인 불교의 융성을 중심으로 여가가 행해졌다. 이 시기에는 종교적 행사에서 놀이적 요소가 가미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적 축제인 연등회와 팔관회 때에는 술과 음식을 차리고 호화로운 연회와 다양한 유회를 즐겼다. 이 시기의 풍류는 대부분 신라의 문화가 전승되었지만, 신라의 것보다는 더욱 집단적이고 향락적인 면이 강했고, 음악이나 술이 가미된 풍류가 유행하였다. 명절에는 씨름이 유행했고, 꼭두각시놀음 같은 인형극도 생겼다. 그리고 수희라는 오늘날의 수영과 같은 놀이도 있었으며, 생업이 아닌 레크리에이션 활동으로 낚시를 즐기기도 하였다. 

팔관회

 

4. 조선시대의 여가

 

 조선시대에는 유교정치의 바탕이 되는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지배계층인 사대부는 부와 상관없이 자연을 동경하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영위하였다. 그들은 술과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는 삶을 살았다. 사대부계급은 노역의 의무에서 제외된 지식인이었는데 비해, 서민계급은 주로 농·공 ·상 ·어업 등에 종사했기 때문에, 양반사회에 대한 불만이 잔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탈춤과 광대놀이 등으로 지배계급에 대한 불만을 해학적으로 풍자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실학이 등장하면서 미술분야에서의 풍속화에 많은 놀이유형이 묘사되고 있는데, 특히 서민의 농경놀이문화가 잘 표현되고 있다. 농경사회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집단놀이 ·대동놀이가 삶과 생계의 터전에서 발생했고, 놀이는 생산과 노동을 보충하여 재생산의욕을 창출하는 기회로 발전했다. 이 당시 대표적인 놀이형태로는 산유 ·농악 ·쥐불놀이 ·호미씻기 ·광대놀이 ·제기차기 등이 있다. 

 

풍속화(신윤복)

 

5. 일제강점기의 여가

 

 일제강점기와 해방으로 연결되는 근대사회는 일본과 그 밖의 열강들의 놀이문화가 강제로 우리 문화에 합해졌기 때문에 우리 여가 역사상 가장 빈약하고 어색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개화기를 전후하여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이 가시화되자 일부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국민 계몽운동이 전개되고, 이 과정에서 계몽을 위한 거국적 출판이 활발히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전래소설과 신식소설이 대량 출판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일본으로부터 화투, 서구로부터 농구·배구 ·축구 등이 전해졌다. 화투는 주로 노름으로, 구기 종목은 학생들의 신체단련으로 행해졌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신흥지식층이 생겨났다. 이들은 미국, 일본에서 들여온 문화를 최고로 인식했고, 화투, 라디오, 레코드 등이 활발히 전파되었다. 선교사, 유학생, 일본 이주자들에 의해 신식놀이가 본격 보급되었고, 1920년대 초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었다. 축음기의 전파로 대중가요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영화가 수입되어 대중가요와 함께 여가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서구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 사이에 일과 여가가 명확히 구분되기 시작했다. 

 

6. 해방 이후의 여가 

 

 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여가를 즐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후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자연 및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다. 정치 ·경제적인 악순환으로 인해 국민의 생활은 오직 그날그날의 생존에 급급했다. 그 결과 국가시책은 황폐화된 국토환경을 복구하는 것이었으며, 이 시기의 여가행정은 국가체제를 새로이 정립하는 과정에서 극히 필요한 행정기관의 설치에만 머물렀기 때문에 국가적인 지원정책이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생존자체가 절박했던 치열한 삶 속에서 여가란 생각하기 어려운 사치에 불과했다. 따라서 자연히 일부 부유층이나 특권층에 의해 여가가 독점되었다. 

 해방 이후 1950년대 초까지는 6.25 전쟁으로 국토공간이 파괴되고, 정치경제적인 악순환으로 인하여 여가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정책적인 사항이 되지 못한 시기였다. 그러나 1953년 노동자들에게 연간 12일의 유급휴가를 실시하도록 보장하는 근로기준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비로소 제도적인 자유시간 곧 여가시간을 갖게 되었다. 1950년대 말 정부의 각종 여가와 관련된 관광 정책 수립과 시행으로 국민들은 서서히 국가의 여가정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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